자료 : 문화관광과
지    명 현 위 치 지        명        유        래
이 천 동 이천동 지금의 수도산 밑에 배나무가 많았으며 그 밑에 맑은 샘이 솟았다고 하여 “梨泉洞”이라 불리어졌음.
봉 덕 동 봉덕1, 2, 3동 200~300년전에 고산골에서 맑은 물이 내려오는 들판으로 전․답으로 형성되었으며, 매화나무가 많아 “매화골”로 칭하여 왔다고 하나 도시의 팽창으로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,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산동과 덕산동을 병합하여 “鳳德洞”이라 하였음.
대 명 동 대명동 일대 대명동이라는 동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(杜師忠)에서 연유된다. 두사충은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왔으며, 정유재란이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게 되었다. 조정에서는 현재 중앙공원 일대에서 살도록 하였으며 그 후 두사충은 최정산(현재의 대덕산)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“大明洞”이라 붙이게 되었다함.
고 산 골 봉덕2동 신라시대에 한 임금이 왕자가 없어 걱정하던 중 꿈에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서 불공을 드릴 것을 권하자 이곳에 “古山寺”를 창건하여 불공을 드린 결과 두 왕자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뻐한 임금은 고산사에 석탑을 세웠다고 함. 고산사는 임란때 왜병에 의하여 멸실을 당하였고 그후 1961년 법장사를 중건하였으며 당시 고산사가 있었다 하여 “고산골”이라 부르게 되었음.
은 적 사 봉덕3동 봉덕동 산157-2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은적사는 926년(고려초)에 지어졌으며, 신라말 후백제의 견훤과 격전시 고려태조 왕건이 대패하여 단신으로 적의 추격을 피해 지금의 앞산(대덕산) 계곡으로 왔을 때 그 당시 왕건이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“隱跡寺”라고 칭하고 있음.
삼 정 골 봉덕3동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중 왕건이 일시 패배하여 隱跡寺에 몸을 숨겼다가 밖으로 나와 앞산에서 내려오니 우물 세개(三井)가 있었다는데서 불리어진 것이라고 함.